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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上)

  • 임선규
  • 2009-08-27 오후 11:58:47
  • 12,025
  • 메일

護國大聖師 西山大師


서산대사는 1520년(중종 15년) 3월 평안도 안주에서 47세 동갑내기 부부인 완산 최씨 세창과 김씨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세창은 아이의 이름을 틀림없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으로 믿고 ‘너를 믿는다’는 뜻으로 ‘여신(汝信)’이라고 불렀다.


여신이 세 살이 되던 해 사월 초파일 낮에 최세창이 비몽사몽 간에 꿈을 꾸었다. 노인이 나타나 “애기스님을 뵙기 위해 찾아 왔습니다. 애기스님의 이름을 운학(雲鶴)이라 하십시오.” 하여 운학으로 고쳤다.


운학은 태어날 적부터 보통 아이와는 다르게 총명하였고, 기골이 맑고 빼어났다. 여러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도 항상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고, 기왓장을 가져다 절을 세우는 놀이를 하면서 놀았다.


운학의 나이 아홉 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이듬 해에는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된다. 이 때 천재 소년 운학의 소문을 들은 안주군수 이사증이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였다. 열 살이 된 겨울이었다. ‘비낄 斜’자를 넣어 글을 짓게 하니 운학은 즉시 “향기 어린 높은 누각에 해가 기울기 시작하니(香凝高閣日初斜)”라고 답했다. 다시 ‘꽃  花’ 자를 불러주니 “천리 강산에 눈이 꽃과 같구나(千里江山雪若花)”라고 하였다.


탄복한 이사증은 운학을 양아들로 삼아 서울로 데리고 와 성균관에 입학시켰는데 그때 나이 12살이었다. 운학은 최고 교육 기관인 성균관에서 본격적인 유학 공부를 해 3년 동안 글과 무예를 익혔다. 그리고 15세가 되는 해 알성과를 보았으나 낙제하였다. 당시의 급제자는 34세의 퇴계 이황이었다고 한다.


마침 스승 박 상(朴祥)이 호남지방에 감사로 나가게 되어 같이 공부하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스승을 따라 갔으나, 부임한 지 몇 달이 안 되어 스승이 상을 당해 다시 서울로 올라갔다. 그때 한 동료가 왕 경치 좋은 곳에 왔으니 우리 모두 천천히 산천구경이나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해 모두 가벼운 행장으로 지리산을 찾아갔다.


친구들과 지리산에 들어와 화엄동, 연곡동, 칠불동, 의신동, 청학동을 돌아다니며 크고 작은 절에서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며 반 년 동안을 지리산 일대를 자유롭게 여행하던 중, 쌍계사에서 칠불사로 들어가는 입구 마을에 있는 신흥사의 작은 암자에서 숭인스님(崇仁長老)을 만났다.


“젊은이 관상을 보니, 상호(相好)가 잘 생기고, 기골(氣骨)이 맑고 빼어나서 보통 사람이 아니다. 큰 도인의 관상을 갖추었으니 불문에 입문하여 도를 닦아 마음을 깨달으면 부처가 될진데 마음을 일으켜 대장부가 돼 출가해 보시게. 세상의 부귀영화, 명리(名利)는 본디 허망하여 백 년을 찾아 나서도 만족을 가져다 주지 못하고 결국은 허망한 것이니 유학을 버리고 불법을 닦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그리고는 <전등록>, <염송>, <화엄경>, <능엄경>, <법화경>, <유마경>, <반야경> 등 경전을 주면서 자세히 읽고 깊이 생각하면 점차 불문에 들어갈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 뒤 동료들은 서울로 돌아가고 운학만 선방에 남아 여러 대승경전과 선에 관한 서적을 읽으면서 숭인스님을 모시고 행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 부패하고 신분 차별이 심했던 조선시대에서 스님이 되어 입산수도한다는 것은 권력과 재산이 없어 자기의 포부를 펴 볼 길이 없는 그 당시의 운학과 같은 처지의 젊은이들로서는 공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숭인스님은 운학이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인재라고 판단하여 지리산에서 제일가는 스승인 부용(芙蓉)스님에게 데리고 갔다. 부용스님은 지리산의 생불이었다. 숭인스님과는 법형제로소 벽송당(碧松堂) 지엄대사(智嚴大師)의 제자였다.


부용스님은 교학(敎學-대장경)을 버리고 오로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불조(佛祖)의 혜명(慧命)과 전등(傳燈)을 계승한 임제종의 적자(嫡子)였다. 달마대사의 선(禪)의 가풍이 육조 혜능대사에게 이어졌고, 또 그것이 임제대사에 의해 임제종으로 성립된 후 중국 선종의 대표 종파가 되어 고려 때 태고 보우가 중국에 가서 임제종의 법통을 가져와 부용스님에게까지 이어졌는데 이제 이 법통이 운학에게로 고스란히 넘겨지게 된 것이다.


운학은 숭인스님이 주신 불경을 다 읽고, 부용스님으로부터 3년동안 부지런히 선학(禪學)을 배워 불교의 교리를 어느 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이니, 무상이니, 空이니 하는 내용을 지혜로 이해하는 지혜 해탈을 얻었으나, 아직 마음으로 깨달은 심해탈(心解脫)은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운학은 갑자기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 선정(禪定)에서 깨어나 말이나 문자로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진리의 세계를 깨달았다. 얽매어서 답답하던 마음이 확 트이고 환희심이 솟아났다. 이때 심경을 시로 읊었다.


문득 창 밖의 두견새 울음소리 들으니.

눈에 비치는 모든 봄의 산이 내 고향이로구나.


忽聞杜宇啼窓外(홀문두우제창외) 

滿眼春山盡故鄕(만안춘산지고향) 


운학은 갑자기 들려오는 두견새 울음소리를 듣고 마음 속에 맺혀있던 의혹의 먹구름이 활짝 걷히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아무 집착도 없는 청정한 본래 마음으로 이 세상의 실제 모습을 보았다.


눈에 보이는 꽃피는 봄의 산이 그대로 아름다운 부처님의 나라(불국정토)임을 깨달았다. 운학은 길고 먼 방황은 이제 끝났다. 드디어 고향을 찾은 것이다.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냇가에서 물을 길러 지게에 지고 절로 돌아오는 길에 멀리 구름에 쌓인 산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그 깨달음의 심정을 읊었다.


물을 길어 절로 돌아오다 문득 머리를 돌리니

푸른 산이 흰 구름 속에 있네.


汲水歸來忽回首(급수귀래홀외수) 

靑山無數白雲中(청산무수백운중) 


그리고 다음 날 아침에 출가 사문이 되었다.


꽃피는 화개동엔 오히려 꽃이 지고

청학의 둥우리에는 아직 학은 아니 돌아오네.

잘있거라 홍류교 아래 흐르는 물아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나는 산으로 돌아가련다


花開洞裏花猶落(화개동리화유락)

靑鶴巢邊鶴不還(청학소변학불환) 

珍重紅流橋下水(진중호류교하수) 

汝歸滄海我歸山(여귀창해아귀산)


운학은 숭인스님을 은사스님(養育師)로 모시고, 영관 부용스님을 법을 전해주는 전법사(傳法師), 일선스님을 비구계를 수여해 주는 수계사(授戒師), 석희스님, 육공스님, 각원스님을 증명계사(證戒師)로 모시고 비구계(比丘戒)를 받았다.


비구계는 19세에 받는다. 이때 받은 법명이 휴정(休靜)이다. 휴정이란 뜻은 마음의 번뇌와 산란함을 고요하게 쉬게 하여 깨달음의 세계인 고요한 진여의 세계에 머문다는 뜻이다. 청허(淸虛)는 스스로 불렀던 호이며, 나중에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서산(西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휴정이 진리를 찾아서 끝없는 구도의 길을 나서 제일 먼저 찾아간 스승은 도솔산에 계신 학묵스님이었다. 학묵스님은 휴정을 보자 큰 그릇임을 단번에 알아보고 인정해 주었다. 이제 휴정에게는 더 이상의 스승은 필요없게 되었다. 스스로 스승이 되어 형상이 없는 마음을 깨고 진리의 문에 들어서기 위한 피나는 용맹정진만이 필요했다. 


도반(道伴)을 찾아 전북 남원을 지나 성촌 마을 앞에서 문득 한낮에 우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는 칠흑처럼 캄캄한 마음의 의혹을 깨부수고 활연대오(豁然大悟)하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머리털은 희었으나 마음은 희지 않았다고

옛 스승님은 일찍이 말씀하셨네.

문득 닭 울음소리를 듣고

대장부의 할 일을 모두 마쳤네. - 오도시(悟道詩)


髮白非心白(백발비심백) 古人曾漏洩(고인증누설)

今聽一聲鷄(금청일성계) 丈夫能事畢(장부능사필)


문득 깨달음을 얻어 내 집에 이르니

온 세상의 사물들이 그대로 진리의 세계로다.

깨달은 자에게는 팔만대장경도

원래는 하나의 빈 종이로구나. - 도통시(道通詩)


忽得自家底(홀득자가지) 頭頭只此爾(두두지차이)

萬千金寶藏(만천금보장) 元是一空紙(원시일공지)


그 뒤 영관 부용선사로부터 인가를 받고 운수(雲水) 행각을 하며 공부에만 전념을 하다가 1549년(명종 4년)에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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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공산 2009-09-02 오후 12:18:24 덧글삭제
    서산대사의 좋은 글 감사합니다. 그런대 서산대사와 대흥사와의 관계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서산대사의 부도는 어떻게 대흥사에 있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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