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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中)

  • 임선규
  • 2009-09-08 오후 10: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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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는 연산군 이래 오래동안 폐지되었다가 명종 5년(1550년) 보우스님이 부활한 승과시험에 주위의 권고로 어쩔 수 없이 나아가, 30세의 나이로 수석 합격하여 대선(大選)이라는 이름을 얻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대선에서 전법사(傳法師를) 거쳐 3년만인 36세에 교종판사 겸 선종판사 즉,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어 불교의 최고 높은 법계인 도대선사(都大禪師)에 이르렀다. 불과 5~6년 안에 이루어낸 초고속 행진이었다.


그러던 1556년 어느 날, “내가 출가한 본 뜻이 어찌 여기에 있겠는가”라고 탄식하고는 홀연 금강산에 들어가 혼자 미륵봉 아래에서 살았다. 그 뒤 두류산, 태백산, 오대산, 묘향산 등을 두루 행각하며 스스로 보임(保任)하였고, 후학을 만나면 자상하게 지도해 주었다.


그리고 대사의 세수 56세에 32세의 유정 사명당과 묘향산에서 사제지간이 된다. 유정은 20대 젊은 나이에 직지사 주지를 맡았고, 삽십을 넘겨서는 봉은사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마치 대사가 걸었던 전철을 밟듯 영예로운 모든 자리를 뿌리치고 묘향산에 들어와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선조 12년에 유정, 보원, 의천, 법융 등 6~7명의 제자들이 ‘각기 바랑을 털어’ 대사의 대표적 저서인 <선가귀감(禪家龜鑑)>을 간행한다. 그때가 1580년이었고, 대사는 환갑을 맞았다. 그 다음 해에 스무 살 된 소요태능(逍遙太能)이 찾아와 대사의 제자가 된다. 그 뒤 1586년 겨울, 대사는 묘향산 금선대에 있었는데, 제자 행주와 유정, 보정이 <금강경오가해>를 가지고 찾아와 물었으므로 답을 해주었다. 그것을 모아 기록한 것이 <선교석(禪敎釋)>이다.


그로부터 3년 뒤 근 2년간에 걸쳐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게되는 ‘정여립 역모사건’이 일어난다. 이때 서산대사의 나이 70세. 요승(妖僧) 무업이 서산대사와 사명스님이 정여립 역모사건에 가담했다고 무고하였다. 무업은 대사가 쓴 시 <등향로봉(登香爐峰)>을 증거로 제시했다.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

천추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같구나.

밝은 달 아래 맑은 허공을 베개 삼으니

한없는 솔바람의 곡조가 아름답도다


萬國都城如蟻室(만국도성여의실) 

千秋豪傑若醯鷄(천추호걸약혜계)

一窓明月淸虛枕(일창명월청허침) 

無根松風韻不齊(무근송풍운부제)


위 시의 첫 구절 ‘만국의 도성은 개미집과 같고(萬國都城如蛭蟻)’에서 만국을 조선으로 보면 도성인 한양이 ‘개미집’ 같고 ‘천추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같구나(千家豪傑若醯鷄)’에서는 당시 벼슬아치들이 초파리라는 뜻이 숨어 있으니 반역의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서산대사는 묘향산 보현사에서 의금부 도사에 의해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천여 명의 묘향산 승려들은 붙들려가는 노스승의 뒷모습을 보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정여립이 동인이었던 만치 서인의 거두로 추관이 된 정철은 염라대왕처럼 설쳤다. 정철은 처음부터 서산대사에게 있을 리 없는 정여립과의 관계를 추궁했다. 문제가 된 대사의 시 구절에 반골 기질이 드러나 있는데  그런 반골이 이번 역적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는 억지를 부렸다.


정철을 위시해서 이번 역옥 사건을 맡아 치죄하는 조정의 관료들은 대사를 다루는 데 있어 단순히 역모를 한 혐의자로서만이 아니라 자기네와 적대되는 이교도를, 그리고 또 양반으로서 천인을 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들에게 대사가 불문의 큰 스승일뿐만 아니라 덕망과 인품 그리고 시문(詩文)으로 일반 사람들에게까지도 명성이 높다는 것은 아니꼽고 괘씸한 일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대사를 다루는 데 더 가혹했다. 육체적 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야유와 냉소도 이어졌다.


국문은 여러 날 끌었다. 그동안 대사의 여윈 몸에는 곤장이 여러 번 내려쳐지기도 했다. 혹시 왕이 자리를 뜰 때면 정철은 느물거리는 태도로 제 모가지를 도리는 손짓을 해 보이며 죽음으로 위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국청에서 대사는 한결같이 의연했고 대답은 짧았다. 묻는 사실에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고 할 뿐이었다. 다른 말은 일체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의 태도는 지금 자기가 친국을 당하는 자리에서 피에 젖은 형틀에 매여 있다는 것을 잊은 듯 할 때가 많았다. 형틀 위에서 백설같이 흰 눈썹을 들어 맑은 하늘을 쳐다보는 대사의 표정은 마치 지팡이를 짚고 길을 나선 듯 담담했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이루어진다. 선조는 서산대사의 이름을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터라 관심을 가지고 밀사를 묘향산 보현사에 보내 서산대사의 행적이나 혐의가 될 만한 증거가 있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밀사가 다녀와서 선조에게 아뢰었다. “묘향산 절 안을 수색하여 보아도 서산대사가 역모에 연루된 행적이 없을뿐더러, 서산대사가 아침마다 축수문에 ‘주상전하 성수만세’라는 상축(上祝)을 써놓고 기도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얼마 더 끌기는 했으나 대사는 결국 무죄로 석방되었다. 왕의 처분이었다. 그뿐 아니라 왕은 압수해 온 서산대사의 시문집을 보고 반역의 증거로 제출된 <등향로봉> 시를 ‘참 좋은 시’라고 평한 뒤 편전에 대사를 불러 손수 대나무를 한폭 그려주면서 위로하였다. 당시의 숭유억불의 상황에서는 엄청난 파격이요, 특별 대우라고 말할 수 있다. 왕도 이전부터 글 잘하는 시승(詩僧)으로서 서산대사의 이름을 익히 들었던 것이다.


잎사귀는 스스로 붓 끝에서 나왔고

그 뿌리는 땅에서 나지 않았네.

달이 돋아 와도 그림자 볼 수 없고

바람에 움직여도 소리 들리지 않네. - 묵죽시(墨竹詩)


葉自毫端出(엽자호단출) 根非地而生(근비지이생)

月來無見影(월래무견영) 風動不閒聲(풍동불한성)


대사는 이 시를 받고 그 자리에서 운을 달아(次韻) 답시를 지어 올렸다.


소상(瀟湘)의 한 가지 竹이

聖主의 붓끝에서 나왔어라.

山僧의 향불 사르는 곳에

잎마다 가을 소리 띠었고녀.


瀟湘一支竹(소상일지죽) 聖主筆頭生(성주필두생)

山僧香爇處(산승향설향) 葉葉帶秋聲(옆옆대추성)


그 자리에 입대해 있던 대신들은 이때에 두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천안을 지척에 뵈옵고, 왕의 진필을 받았다? 그것은 궁중부중의 측근자 중에도 흔치 못한 영광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욱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죽음 앞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시 그 같은 영광 앞에서도 담담한 대사의 모습이었다.


대사는 물론 어전에서 갖추어야 할 예법대로 숙연히 절하고 받들었다. 그러나 그뿐, 당연히 그래야만한 감격, 감읍의 눈물도, 이마를 조아리는 소리도 없었다. 자기의 소회를 사뢰는 중언부언 같은 것도 없이 담담히 물러 나갔을 뿐이었다.


서산대사는 일생 일대의 위기에서 오히려 ‘상감님까지도 알아주는 도승!’으로 그 명성이 더욱 높아졌다. 팔도 방방곡곡에 목탁을 두드리며 다니는 동냥승까지도 이야기할 기회만 있으면 자기는 서산대사의 제자라 했고 또 ‘우리 스님’의 이야기를 과장함으로써 자기의 ‘위신’은 물론 조선에 들어와 땅에 떨어진 불교의 위신을 높이고 선전하기에 입에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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