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7월 8일 심적암에 도착한 황준성 의병부대는 일본 수비대에 선전포고를 한 후 에 의병 30명을 풀어 보초를 세우는 등 일본헌병수비대의 기습에 대비하였다. 선전포고를 받은 일본수비대 요시하라 대위는 수비대 22명, 경찰관 3명, 헌병 4명을 이끌고 대둔사로 출동했다. 황준성 대장이 병법에 밝은 군인 출신이란 점을 간파한 요시하라 대위는 대둔사에 정찰대만 파견하는 잔꾀를 부린다. 그리고 초조와 긴장으로 지키던 의병들이 새벽녘에 철수하자 철수하는 의병 뒤를 따라간 일본수비대가 새벽 4시경에 심적암을 포위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수비대의 공격으로 황준성 의병부대는 전사자 24명, 포로 8명과 화승총 47정, 군도 5개를 빼앗기는 피해를 입은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당시 전투 현장에 참가 했던 응송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침허스님 등 심적암의 스님 다섯 분도 이곳 에서 일본 수비대의 총에 맞고 죽었다고 한다.
심적암에서 일본수비대의 포위공격을 뚥고 무사히 빠져 나온 황준성 대장은 현산면 읍호리 이 참판댁으로 피신한 후에 보성, 순천 등지로 피해 다니다가, 그해 12월 7일에 해남경찰서에 자수하여 1910년 4월 22일에 대구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추기엽은 대둔사 패전의 책임을 물어 부하들에게 피살되었다. 의병 지휘자 중 유일한 해남 출신이었던 황두일은「대토벌작전」실시 직전에 부하 일부와 같이 자수하였 는데, 이에 따라 그의 부하들이 대거 자수한 듯 하다. 다만 주도 인물 가운데 강성택 만이 유일하게 체포를 면하였던 것 같다.
생포된 8명의 의병도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심적암에서 살상된 24명의 의병과 5명 의 스님은 현무교 부근, 지금의 매표소 뒷편에 집단으로 매장되었다고 한다. 주민들 에 의하며, 1930년대만 해도 이곳 메주바위 밑에는 사람의 뼈를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자료 : 대둔사의 역사와 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