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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웅보전과 침계루의 현판 글씨

 

 

 

 

 

 

 

대웅보전과 침계루의 현판 글씨

                                                                                                                                                                                    常玄居士 姜 良 遠

대흥사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침계루(枕溪樓)의 현판 글씨는 230여 년 전 영조(英祖)시대의 사람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가 쓴 글씨이다. 이광사의 집안은 전주이씨 왕실의 가문으로 전성기를 누리다가 영조임금이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대 숙종(1674-1720)임금은 정부인으로 부터는 왕자를 낳지 못하고 장희빈에게서 원자를 낳았고, 무수리 최씨에게서 또 왕자를 낳으니 연잉군이다. 그간 서인들은 남인과의 치열한 당파싸움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고서 남인들의 처벌을 둘러싸고 강경파인 노론(老論)과 온건파인 소론(少論)으로 갈린다. 그리고 장희빈의 원자와 최씨의 연잉군을 세자로 옹립하기 위하여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다가 결국 원자를 지지하는 세력인 소론(少論)이기고 1720년 원자가 20대 경종임금에 오른다.

이에 소론은 정적이 된 노론을 숙청하기 위하여 이듬해 신축년 3월부터 다음해 임인년에 걸쳐 소위 신임사화(辛任史禍1721-1722)를 일으켜 노론 4대신 등 50여명을 처단하고 유배시켰다. 그러나 경종은 무자다병(無子多病)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1724년 죽고 연잉군이 임금이 되니, 이가 21대 영조(1724-1776)임금이다. 이제는 노론이 소론을 처 부수었다. 이 와중에 원교의 가문은 소론파이어서 원교의 부친은 유배를 갔다가 원교 23세인 1727년에 돌아와 병사한다.

1728년에는 소론의 잔당들이 불만을 품고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는데, 원교의 백부가 연루되어 옥사하니 그는 관계진출을 포기하고 학문과 서화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영조 31년(1755) 그가 51세 되던 해에 나주벽서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나주객사에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여졌는데, 이는 윤지(尹志)의 소행으로 그의 아버지는 소론파의 영수로 고문으로 죽고, 자기는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나주로 이배되어 있었는데 이 벽서를 붙인 것이다. 그는 아들 윤광철과 능지처참되었고, 살아있는 소론무리들은 소탕되고 이미 사망한 수많은 소론 강경파 대신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로서 소론은 완전히 괴멸되고 노론의 시대가 이어진다.

원교는 윤광철과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나주벽서와는 무관한 내용들이었으나 피바람이 도는 국문에서는 목숨이 위태로울 뿐이었다. 그가 참형을 받을 것이라는 소문에 그의 부인은 두 아들과 일곱 살배기 딸 하나를 두고 자결하고 만다. 원교는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고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이후 영조 38년(1762)에 진도로 이배 된 뒤 다시 완도 신지도로 이배되었다. 그리고 이곳 절해고도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1777년 세상을 떠났으니 신지도에서만 15년, 함경도에서 부터는 무려 생애 22년간이나 긴 유배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조선시대 유배 형기는 원칙적으로 무기종신형이었으며, 유배자는 군왕의 사면과 권력의 변화와 정세의 변동이 없는 한, 대부분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고서야 끝난다. 원교는 어려서 하곡 정제두에게서 양명학을 배우고, 백하 윤순에게서 정통서예를 배웠다. 그러나 절해의 고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서법의 한계를 떨처 버리고 자연스러움과 획 하나 하나의 리듬에 자신의 희로애락의 감정을 담아내었다. 그의 글씨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듯하면서도 조화롭고,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볼수록 정감이 느껴지는 생명을 담아내었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 제주로 귀양가는 길에 친구인 일지암의 초의선사에게 들려 가면서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떻게 그가 쓴‘대웅보전’현판을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내리라고 했다가, 9년 후 귀양이 풀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들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내리라고 했던 원교의 현판을 다시 걸어 놓으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러한 원교의 글씨는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18세기 초에는 서화사에서 민족 특유의 자각이 싹트는 시기였다.  그림에서는 정선(1676-1759)이 조선의 산야를 그려내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화풍을 전개하였고, 글씨에서는 성호 이익의 형인 옥동 이서(1662-1723)와 서화가이며 옥동의 친구인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중국의 글씨체만 본받을 것이 아니라 진정한 조선의 글씨를 써보자고 시도한 것이 소위 동국진체(東國眞體)로써 민족고유의 정서와 감정을 토대로 조선적인 자연스러운 조형성을 추구하였다. 연동의 ‘녹우당(綠雨堂)’ 현판은 이때에 이서가 당호를 짓고 쓴 글씨이다. 이러한 동국진체는 신지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원교에 의하여 1764년‘원교서결’을 써서 완성시켰다. 자연스러움과 근골격, 전서와 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왕희지체를 본받았으나 우리민족 고유의 생명력을 강조하였다.  이는 중국과 조선의 서법을 역사적으로 상호비교하고 조선특유의 서법을 밝혔으며, 동국진체라고 하는 조선고유 서체의 형성과정과 이론을 확인 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대흥사의 현판은 원교가 신지도 유배지에서 쓴 글씨로써 동국진체의 유물이 될 것이다. 오늘은 다시 한 번 ‘침계루’와 ‘대웅보전’을 감상하면서 동국진체를 음미해 보자. 그리고 천형의 삶을 살다간 원교의 고뇌를 되새겨보자. 원교는 기약 없는 유배를 떠날 때 죽은 부인 앞에 피눈물을 흘리며 도망(悼亡)이라는 시를 읊었다.

 

내가 비록 죽어 뼈가될 지라도 이 한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내가 살아 백번을 윤회한다 해도 이 한은 정녕 살아 있으리.

천지가 뒤 바뀌어 태초가 되고, 해와 달이 빛을 잃어 연기가 되어도

이 한은 맺히고 더욱 굳어져, 세월이 흐를수록 단단해 지리라.

내 한이 이와 같으니, 당신 한도 정녕 이러 하리라.

두 한이 오래도록 흩어지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만날 인연 있으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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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천왕 2009-07-28 오후 8:06:17 덧글삭제
    좋은 글 감사 합니다. 강 거사님의 글로 자세한 대웅전 현판 글씨 내용의 역사를 알 수 있어서 너무 좋습니다.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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