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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下-1)

  • 임선규
  • 2009-09-18 오후 12:44:29
  • 12,653
  • 메일

서산대사가 묘향산에서 73세를 맞은 선조 25년,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총으로 무장한 약 16만명의 육군에, 수군을 합하면 20여만명이나 되는 왜놈들이 7년 동안 우리 강산을 유린(蹂躪)하고 백성들을 살육하는 대재앙이 벌어진 것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성이 함락되었고 왜군은 20일만에 한양에 입성했다. 그러나 썩어 빠진 당시 조정은 무능하기 그지없었다. 선조는 나라를 지키려 하기 보다는 제 한 목숨 건지고자 도망치기에 바빴다. 여차하면 명나라로 넘어가려 허겁지겁 북으로 기어 올라갔다. 행재소(行在所-궁중을 떠나 임금이 머물던 곳)는 명나라 국경에 다다렀고 조금만 더 밀릴 경우 아예 국경을 넘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국가의 상징인 행재소가 국경을 넘으면 어떻게 되는가? 나라를 빼앗기는 것이다.


그 난리 속에서도 나라와 백성을 지켜줘야 할 벼슬아치들은 정쟁은 그치지 않은 채 피난가기에 급급했다. 남쪽으로부터는 왜놈들이 조선 백성을 죽이고 집을 불태우고 먹을 것을 빼앗으며 올라오고 있었고 북에서는 도와준다고 온 명군들이 먹는 것은 조선에서 해결한다며 백성들의 식량을 빼앗고 행패까지 부리는 가운데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왕실과 사대부들도 그 와중에 또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기운없는 노인과 아이들이 굶어 죽고 부녀자들은 겁탈당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옥도가 조선에서 벌어졌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이 기적처럼 바다를 장악함으로써 겨우 조선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바다에서 무인(武人)인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면 땅에서는 사대부들이 ‘부모, 임금도 모르는 죄인(無父無君之罪人)’이라 하여 칠천(七賤)에 포함시켜 온갖 천대를 자행한 승려들이 서산대사의 영도 아래 큰 역할을 했다.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아비규환 속에서 신음하는 조선 백성들을 생각하며 깊은 시름에 빠졌다. 나라는 불교를 버렸지만 불법은 나라를 버릴 수 없다. 그것은 자비로서 구제해야 할 중생이 사는 땅이기 때문이다. 왜놈들이 이 땅의 중생들의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전리품으로 가져가는 만행에 대사는 치를 떨었다. 저 아수라 왜적들과 한 하늘을 이고 같은 땅을 밟으며 살 수는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때마침 대사의 제자 영규스님이 승병을 이끌고 왜군 토벌에 나서 1592년 8월 1일, 청주성을 회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깨우침을 얻었던 영규스님은 공주 청련암(靑蓮庵)에서 무예를 익히고 최초로 승병을 일으켰고 이는 전국적으로 승병이 궐기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왜군들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던 청주성을 수복한 뒤, 의병장 조헌과 합세해 금산으로 도망간 왜적들을 뒤쫓아 치열한 전투 끝에 장렬히 전사했다. 그 때 조정에서는 영규대사에게 당상(堂上)의 벼슬과 상을 내렸으나 그것을 받지 못하고 순국함으로써 너나없이 영규대사를 애석하게 여겼다.


영규스님에게는 사후에 종2품 동지중추부사라는 벼슬이 추증되었다. 그러나 금산에 조헌과 700명 의병의 주검을 합장한 ‘칠백의총’과 ‘순의비’는 남아있으나 의승군(義僧軍)은 무덤도 비석도 없다.


임진년 9월, 선조는 청주성 탈환 전투에서 의승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의승군을 전투에 이용하여 반격을 시도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승통(僧統)을 설치하고 의승군을 모집하려고 했다. 그 때 선조는 문득 서산대사를 기억해 내고 묘향산에 사람을 보내 대사를 친히 초청했다.


대사는 묘향산을 내려와 의주에 있는 임금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선조를 만났다. 대사가 선조를 만난 것은 그때가 두 번째였다. 첫 만남은 3년 전(1589년) ‘정여립 역모사건’에 가담한 무업이 서산대사도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등향로봉(登香爐峰)’이라는 대사의 시를 증거로 제시하는 바람에 대사가 의금부에 압송되어 갇혀 있을 때였다.


서산대사를 본 선조 임금은, “나라의 위태로움이 이와 같은 상황인데 대사께서는 어찌 나를 잊었단 말이요. 무슨 도술을 부려서라도 나라를 구할 방도가 없겠소. 대사께서 자비로서 도탄에 빠진 중생을 부디 구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 간절한 말을 들은 서산대사는 가슴이 답답했다. “어찌 하다가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불교를 불효불충의 가르침이라고 국법으로 탄압하고, 조정대신들은 동이다 서다 난리통에 피난 와서까지 싸우더니 드디어 인과(因果)의 시기가 무르익어 올 것이 왔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대사는 죽어가는 중생을 팔짱끼고 바라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파계(破戒)를 무릅쓰고라도 기필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대승계율의 정신이요,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다운 길이라 생각했다. 대사의 계율관은 계율을 위한 계율(소승계율)이 아니라, 출가 수행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참선 수행하는데, 환경의 유혹으로부터 스스로 마음을 조심하고 보호하는 근원적인 마음의 계율(心戒)을 더 중요시하였다.


“분명히 출가 수행자가 창칼을 들고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은 불살생(不殺生)의 부처님 계율(佛戒)에 크게 어긋난다. 더군다나 내가 살자고 상대방을 죽이는 행위 또한 출가 사문(沙門)이 취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 남편, 내 아내의 원수를 갚아 달라!’, ‘내 자식의 원수를 갚게 해 달라!’는 우리 동족들의 염원의 소리를 못 듣는다면 우리가 어찌 이 땅에서 생을 누리는 조선 사람이겠는가!”


서산대사의 대승 계율 정신은 임진왜란을 맞아 도탄에 빠진 중생과 국가를 구하기 위해 승병을 일으킴으로써 유감없이 발휘됐다.


대사는 선조에게 말했다.

“소승인들 무슨 큰 계책이 있겠습니까마는 지금 당장 전국에 있는 전 승려들을 모아서 창과 방패를 들고 적군을 맞아 죽음으로써 임금님의 은혜에 보답하고 나라를 구할 것입니다. 나이가 많은 승려로서 전쟁터에 나아갈 수 없는 승려들은 각기 있는 절에서 왜적이 물러가 나라의 태평이 하루 속히 올 수 있도록 조석으로 불전에 예배하고 기도하도록 하여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나라가 평안해지도록 하겠습니다.”


대사의 이와 같은 결연한 의지는 <선가귀감>의 ‘사은(四恩)’에서 찾아야 한다. ‘부모와 나라와 스승과 시주의 은혜’. 물론 나라와 부모, 스승의 은혜는 이 세상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그러나 사문에게는 한 가지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시주(施主)’의 은혜다.


사문에게 시주는 가까운 이웃이자 나라 안의 모든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라 안의 백성들이 왜군의 칼날 아래 신음하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백성들의 아픔은 사문 자신들의 아픔이었다. 어찌보면 시주를 보호하고 구해야 할 일이 국왕과 국가보다 앞서는 과제일 수도 있었다. 대사의 눈앞에 당장 ‘시주’를 보호하고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이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곧 자비(慈悲) 실현의 다른 표현이다. 대사는 당시 견성(見性)을 한 선지식이었다. 대사는 공(空)을 수행해온 수행자였다. 이미 생사문제를 초탈한 대사는 “나라의 위태로움을 구제할 수 있겠느냐”는 선조의 물음에 앞서 벌써 나라를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대사 자신이 空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주장자를 놓고 칼로 바꾸어 쥔 서산대사의 사상이었다.


‘어진 중생들을 위해서라면 살생도 살생이 아니라 오히려 불보살의 자비가 아니겠는가!’


드디어 호국의 대성사(大聖師) 서산대사가 73세의 나이에 나라를 구하기 위해 백마 타고 전쟁터에 나섰다. 서산대사는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에 임명되어 전국의 승군을 통솔하는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 팔도십육종도총섭은 8도에 선종과 교종 각 두명의 총섭을 두고, 그 16총섭을 거느리는 최고 총섭이다. 조정에서는 그들이 없앤 선․종 양종을 부활한 셈이었다.


승군의 총본부는 순안(順安) 법흥사였다. 그때 순안에는 전군의 총사령부 격인 원수부(元帥府)가 있었다. 서산대사는 전국 8도에 승려들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띄웠다.


『팔도십육종도총섭인 서산 휴정은 전국의 승도(僧徒)들에게 분연히 일어나 구국참전(救國參戰)할 것을 호소하는 글을 띄우노라. 잔인 무도한 왜적들은 삽시간에 우리의 강토를 유린하고 부모형제를 강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집과 재산을 불태워 없애버렸다. 어린아이의 코와 귀까지 베어지고, 무자비한 도륙(屠戮)으로 종묘사직(宗廟 社稷)이 온전히 더럽혀졌으며 부처님을 모신 사찰이 불태워지고, 또한 승려들이 그들에게 만행을 당했다.


이제 우리 민족의 운명이 바람 앞 등불의 위기에 있거늘  한 나라의 어엿한 백성으로서 우리 승려들이 어찌 가만히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 늙은 스승인 서산이 앞장서서 적진에 뛰어들어 죽음으로서 도탄에 빠진 백성과 나라의 운명을 구할 것이니, 전국 사찰에 있는 승려들은 지체없이 주장자 대신 창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아가 보국진충(報國盡忠)하라.


내가 살고자 남을 죽이는 것은 불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나 살육을 일삼는 왜놈의 만행을 그대로 방관만 하는 것은 더더욱 승려가 취할 바가 아니다. 내 목숨을 버려 중생을 구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생이 사는 땅을 지키는 호국불교가 우리 조선불교의 자랑스런 전통인 것이다. 나라가 있어야 불법도 펼 수 있느니라.


신라 때 원광법사께서 화랑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제정할 때 임전무퇴(臨戰無退)와 살생유택(殺生有擇)을 설한 것은 부처님 계율인 불살생(不殺生)의 계목(戒目)에는 어긋나나, 뭇 중생을 살리기 위해 자비방편으로 한 것이니 대승계율 정신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부처님께서도 <열반경>에서 “불법을 수호하는 사람은 칼과 활을 들고 불교 교단을 지키고 수행자를 수호해야 하느니 이는 결코 파계가 아니니라”고 하셨다.


내가 죽어서 내 부모형제가 살고, 중생이 살고, 나라가 태평해질 수 있다면 마땅히 우리 출가 사문은 살신구국(殺身救國)의 길을 택하는 것이 출가 대장부의 기개가 아니겠는가. 이 순간 참마음을 내고 용기를 내어 죽기를 결심한 승려는 영원히 죽지 않고 시간을 초월하여 이 민족과 함께 살 것이요, 그렇지 않고 내 목숨 하나만을 부지하기 위하여 대의(大義)를 저버린다면 살아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라 비겁한 중생의 굴레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다.


진여(眞如)의 세계에서는 생사가 일여(一如)요, 찰나가 영겁이니 구차한 중생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마음을 크게 일으켜 깨달음을 얻고, 수많은 중생을 구하는데 주저말고 이 몸을 던져라. 벌써 충청도 공주에서 자랑스런 우리의 도반(道伴) 영규스님은 승군을 일으켜 그 이름을 온 세상에 드날려서 나라로부터 당상관의 벼슬을 얻었도다.


이 늙은 스승을 믿고 따르라. 서산이 앞장 설 것이니라. 소식을 접한 동지들은 서로 격려하고 의기를 투합하여 벌떼와 구름처럼 모여서 일어나라. 우리에게 승리와 행운이 있으리라. 결코 부처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리라. 지금 이 순간 자리를 박차고 모두 일어나라.』


서산대사는 각처에 많은 법제자와 법손들이 있었다. 제자만 1,000여 명에 이르렀고, 그 중에서도 뛰어난 스님이 70여 명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강원도 금강산에 있는 사명유정(四溟惟政)․전라도 지리산의 뇌묵처영(雷默處英)․충청도 공주의 기허영규(騎虛靈圭)․경상도 진주의 중관해안(中觀海眼)․황해도 구월산의 의엄(義嚴)․편양언기(鞭洋彦機)․소요태능(逍遙太能)․정관일선(靜觀一禪)․현빈인영(玄賓印英)․완당원준(阮堂圓俊)․청매인오(靑梅印悟)․기암법견(奇巖法堅)․제월경헌(齊月敬軒) 등이 유명하며, 유정․언기․태능․ 일선 이 네 사람은 가장 대표적인 제자로서 휴정 문하의 4대파를 이루었다. 이들 역시 많은 자기네의 제자들을 거느린 대덕들이었다.


마침내 전국의 각 사찰에 보낸 격문을 본 제자들이 모두 일어섰다. 서산대사의 격문을 제일 먼저 받은 스님은 금강산 유점사에 있던 사명스님이었다. 사명은 스승의 격문이 당도하기 전에 이미 210명의 의승군을 모아두고 있었다. 스승인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자 지체없이 사명은 210명의 의승군을 이끌고 순안 법흥사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에 의승군이 모여들어 1,000여 명이 되었다.


서산대사가 이끄는 의승군과 합쳐서 2,000여명의 의승군단이 되었다. 사명스님은 도총섭인 스승을 돕는 일을 맡았다. 뿐만 아니라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을 맡아 직접 의승군을 지휘 통솔하였다. 사명스님이 전쟁이 끝날 무렵 일본에 강화사로 갈 때는 선조는 사명스님에게 외교 협상의 전권을 일임했다. 뿐만 아니라 임무 수행 중 필요시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하라고 하였다. 누구든 상황이 급박하면 먼저 목을 베고 난 후에 임금에게 보고하라는 엄청난 권한을 부여한 것이었다.


대사는 곧 유정과 처영을 장수로 삼고 제자들에게 각기 자신의 근거지에서 군사를 더 일으키게 함으로써 의승군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처영스님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의 하나인 권율장군의 행주대첩 때 호남지방에서 승군 700명을 이끌고 함께 참전하여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권율의 3,800명의 병력과 처영스님의 700명의 승병이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 왜군 3만 명과 대전하여 2만 4,000명의 사상자를 내게 한 임진왜란 최대의 전과를 이루었다. 처영스님에게 이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의 직함이 내려졌다.

     

<선조수정실록>에는 당시 의승군의 활동을 유자(儒者)들의 시각에서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승군은 접전에 있어서 크게 기량을 보이지는 않았으나 경비를 잘하고 역사(役事)를 부지런히 하여 한 번도 무너져 흩어지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러 도에서 백성들이 그들을 믿고 의지했다.”


임진왜란에 전국의 승려가 참전한 사건은 실로 조선 백성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유생들에게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이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나라가 버린 승도(僧徒)들은 분연히 일어나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의승군을 일으켜서 공을 세우는데 대대로 나라로부터 벼슬과 녹작을 부여받고 공맹(孔孟)의 높은 학문을 추종하는 유생이 나라의 위급함을 당하여 이렇게 비겁하게 보고만 있을 것인가?”


의승군 뿐만 아니라 의승수군(義僧水軍)도 눈부신 활약을 했다. 전라좌수영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용맹을 떨친 의승수군들의 수가 400여 명에서 많을 때는 6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왜적이 영남에서 호남으로 넘나드는 4대 통로가 있었다. 두치, 석주, 팔양재와 육십령이 그 곳인데, 이 중 두치, 석주, 팔양재의 3대 요해처를 의승수군이 맡아 수륙 양면전에서 큰 전공을 세웠다.


승군(僧軍)은 특히 임진왜란의 수많은 전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투인 ‘평양성 탈환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싸움에서 이여송이 지휘하는 명군(明軍)과 조선 관군 그리고 서산대사가 이끈 승군의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해왔던 무패무적의 부대인 소서행장의 5만 왜군을 물리침으로써 전세를 뒤엎었다.

 

대사가 이끈 의승군은 평양성 탈환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동강을 끼고 남쪽으로 내려와 왜군의 후방 통로를 끊어 그들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왜군의 정세를 면밀히 파악, 평양성 공격에 앞서 가장 전략적 요충지인 모란봉을 승군 단독으로 점령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역시 모란봉을 중요시했던 왜적은 2천에 가까운 병력으로 지켰었다. 일설에는 소서행장 자신이 이날 모란봉 방어전을 지휘했다고 한다. 서산대사의 돌격부대는 적의 집중 사격을 받으면서도 큰 깃발을 앞세우고 정상을 향하여 내달렸다. 단병전이 벌어지면서 젊은 스님들이 곳곳에서 희생됐지만 마침내 적의 군막에 불지르는데 성공했고 왜적들은 진지를 버리고 길이 트인 평양성 안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어 군사를 내줄 수 없다는 관군의 도움없이 철저히 승군의 힘만으로 이뤄낸 찬란한 승리였다.


평양성의 지형을 지도와 대조해 본 명나라 제독 이여송은 대사에게 "명군의 포병 진지로 쓰고자 하오니 모란봉을 내주십사"하고 서산대사에게 청했다. 대사는 이를 받아들여 승병 부대를 앞세우고 산을 내려와 평양성 공격에 가세했고 이여송은 대포 백여문을 모란봉으로 올려보내 평양성을 내려다보며 포격을 가했다.


대사는 명나라 이여송의 원군이 평양에 당도하기까지 관군이 흩어져버린 상황에서 선조의 곁에서 힘을 주었고, 명군 이여송 군대와의 합동작전에서는 모란봉 전투에서 이김으로써 평양성 탈환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평양성 탈환 전투에서 대사는 백마를 타고 몸소 싸움터에 나와서 승군을 독려하였다. 대사의 애국심과 고매한 인품에 크게 감동 받은 이여송은 시를 지어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찬탄하였다.


삼가 큰스님의 옥장 아래 봉정합니다.


공명과 욕심에는 조금도 뜻이 없고

도를 닦는 데만 전념하셨네.

위급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총섭이 되어 산에서 내려 오셨네.


謹奉呈(근봉정) 大和尙(대화상) 玉帳下(옥장하)


無意圓功利(무의원공리) 專心學道仙(전심학도선)

今聞王事急(금문왕사급) 摠攝下山嶺(총섭하산령)


제독 이여송에 이어 명나라의 모든 장수와 관원들도 앞을 다투어 글을 보내왔다. 서산대사의 위대함은 중국 대륙 땅은 물론 적국인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하지만 조선의 관리 가운데는 누구 하나 대사에게 격려와 위로의 글을 보낸 이가 없었다.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이 평양성에서 물러난 것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게 있어 최초의 전면적 퇴각이기도 했다.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했던 위기 상황에서 평양성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됐고 그후 줄곧 왜군은 남으로 후퇴하면서 명나라와의 강화 협상을 서두르게 된다.


왜군과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그 기세를 몰아 한강을 건너 영남으로 내려간다. 서산대사와 사명당도 승병 부대를 거느리고 관군과 함께 일본군 추격에 참가했다. 대동강을 건너면서 서산대사는 “지금 쫓기기 시작한 왜적들을 몰아치자. 남해에서 거북선을 거느리고 있는 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은 우리가 이 강토에서 왜적을 남해 바다로 몰아내 주기를 기다릴 것이다”라고 격려했다.


선조 26년(1593년) 정월 평양성이 탈환되었고, 이어서 10월 한양을 되찾았다. 선조는 대사로 하여금 어가(御駕)를 호위케 하였다. 대사는 젊은 승군 100여명을 선발하여 선조의 어가를 궁궐 안으로 모시도록 했다. 선조는 전란 중에 모든 관리들은 서산대사를 재상처럼 대우하라는 어명을 내렸다.


왜적이 물러가기 시작하자 대사는 선조에게 글을 올렸다. “저의 나이 80이 되어 근력이 다했습니다. 이제 군사와 전쟁에 관한 일은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도총섭의 직인을 반납한 뒤 옛날에 살았던 향산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선조는 그 뜻을 받아들여 ‘나라에서 제일가는 큰스님이시고, 선종, 교종을 통틀어 승군의 우두머리 장군이시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불교 종단을 높이 세우고 일으켜서 모든 백성들을 두루 구제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만한 분인 존자(尊者)의 법계에 오르신 분’이란 뜻인 ‘국일 도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 都大禪師 禪敎都摠攝 扶宗樹敎 普濟登階尊者)’란 최고의 시호와 정이품 당상경(堂上卿)의 벼슬을 내렸다. 그리하여 대사는 도총섭의 일을 제자 사명, 처영, 의엄 등에게 맡기고 다시 누더기 한 벌과 빈 밥그릇 하나 뿐인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서산대사의 수제자인 편양(鞭羊)스님은 ‘청허당 행장’에서 대사의 우국충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라를 위하는 내 마음은 화살이나 독을 맞아 죽더라도 한이 될 것이 없다. 다만 나이 장차 80살인데 어찌 장군(도총섭)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너희들에게 장군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니 부디 힘을 합해 나아가라.” 편양스님은 “개국(開國) 이래로 누가 우리 스승만큼 국가와 왕실을 편안히 보전하고 불조(佛祖)를 거듭 빛낸 이가 있었던가”라고 ‘청허당 행장’에 쓰고 있다.


그후 임진왜란이 끝날 때까지 사명당이 전쟁의 마무리 일을 처리했다. 사명당은 서산대사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일본과 강화조약을 맺어 전쟁을 종식시켰다. 사명당은 적국인 일본에 수차례 강화(講和) 사신으로 왕래하면서 포로로 잡혀갔던 3,000여 명의 동포를 구해오고, 볼모로 잡혔던 왕자들을 구해냈다. 전후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평화롭게 처리한 이 일 또한 대단히 큰 일이었다.


사명스님처럼 임진란 전쟁 때 목숨을 내놓고 왜군과 맞서 싸운 승군의 장수들은 모두가 서산대사의 제자들이었다. 혁혁한 전공을 세웠지만 이들 대사의 제자들은 대부분 스승을 본받아 나라에서 제수한 관직을 사양했고 녹봉도 사양했다.

 

역사상 승려의 신분으로 개인적으로 전투에 참여했다든지, 국가의 강제 동원으로 승군을 형성하여 전쟁터에 나가 싸운 적은 있었지만, 임진왜란에서처럼 모든 승려가 불교 지도자의 격문을 보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 목숨을 걸고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위대한 호국대성사 서산대사에 의해 인도에서도, 중국에서도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호국불교의 자랑스런 역사가 시현(示現)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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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길용 2010-06-14 오후 6:48:32 덧글삭제
    감사함니다 너무나 많은걸 께달게하신 작성자에게 감사드림니다 전화 011`9770`9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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