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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의 대흥사 사랑

  • 강양원
  • 2009-11-29 오후 2: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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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산대사의 대흥사 사랑

 

서산대사는 평안도 안주에서 태어나셨고, 분명 평안북도의 묘향산(西山)에서 입적하셨는데 어떻게 대흥사에 부도가 있고, 대사의 유품이 대흥사에 보관되어 있을까? 이에 대한 문헌기록이 희미하여 더러는 대사가 대둔사에는 주석하지 않은 것으로 피력하는 글도 있다.

 

스님의 법명은 휴정(休靜.1520-1604)이고, 법호는 청허(淸虛)이며 평양의 서쪽에 있는 묘향산에 계셨으므로 서산(西山)이라는 별호로 더욱 알려져 있다. 15세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 뒤, 18세 때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3년을 수행하고 남원으로 내려와 길을 걷던 중, 낮닭 우는 소리를 듣는 순간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후 6년여를 지리산 일대로부터 장흥 천관산. 해남 대둔사 등지로 반문문성(反聞聞性)의 보임(保任)수행을 이루고, 27세인 1546년 지리산을 떠나 오대산. 금강산을 거처 묘향산으로 들어간다.

 

31세 때인 1550년 나라에서 승과 시험이 부활되어 주변의 권고로 응시하여 중선과(中禪科)에 합격하고 대선(大選)을 거처 3년 만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의 자리에 올랐다. 37세에 이르러‘출가의 본뜻이 이런 벼슬이나 하자함이 아닌 것’을 반성하고 양 판사직을 반납하고 다시 운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73세인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8도16종선교도총섭(八道十六宗禪敎都摠攝)이 되어 전국사찰에 승군을 모으는 격문을 보내고 순안 법흥사로 내려와 유정(惟政)과 합류하여 2,500여명의 승군을 거느리게 되었고, 처영(處英)은 지리산과 두륜산에서 승병을 일으켰고, 전라좌수영의 의승군이 여천 흥국사를 중심으로 전투에 참가 하였다.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가자, 선조임금에게 나이가 80이 되어 근력이 다했다면서 군사와 전쟁에 관한 일은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맡기고 총섭의 직인을 반납하고 옛날에 살았던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임금은 대사에게‘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존자’의 증호(贈號)를 내렸다. 갑진(甲辰)정월 23일 묘향산의 단적암(丹寂庵)에서 세수 85세로 시적(示寂)하였다.

 

대둔사는 1,811년(순조11)2월 가리포(완도) 첨사가 늧은 밤(二更)에 나졸들과 횃불을 들고 창고에 들어갔다가 불씨가 떨어져 큰 불을 내고 말았다. 이때 가허루와 천불전. 대장전 등 아홉 동의 전각을 잿더미로 만들어 유물과 문헌들이 소실되어버려서 대흥사의 역사기록이 밝지 못한 까닭이다. 불타버린 대둔사의 역사를 전하고자 초의스님(1786-1866)께서 38세 때에 다시 대둔사지를 편찬하였는데, 여기에는‘옛날에 산대사가 남방에 유학할 때 이산(두륜산)에서 주석하였다.(昔我西山遊學 南方駐錫玆山)’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언제 어떻게 계셨는지는 자세한 내용은 없다.

 

대사의 유언내용이 사명당 유정(四溟堂惟政)의‘서산대사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 “내가 죽거든 의발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로 옮겨 기일에 제사를 지내라. 두륜은 후미진 구석에 있어 이름 있는 산은 아니나 귀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뛰어난 것이 있다. 내가 두륜산을 보건대 이곳은 오래도록 변치 않을 긍장(亘長)의 구역이다. 북쪽에는 하늘을 떠받친 월출산이 있고, 남쪽에는 서리서리 얽메어 지축을 이룬(盤結地軸) 달마산이 있어 내가 참으로 즐기는 곳이다. 또 해남은 황폐한 고장이라 국왕의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백성의 풍속이 어리석고 미혹하다.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보고 감화되어 충(忠)에 흥기되는 바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바다와 산이 서로 호위하므로 마을과 골짜기가 깊고 그윽해 만세동안 헐어 깨뜨릴 수 없는(萬歲不毁之地)땅이다.

또한 처영과 모든 제자들이 모두다 남쪽 지방에 있다.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서로가 불법은 지리산에서 들었으니, 이곳을 종통으로 삼는 것이 도리어 귀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유촉을 쫒아서 의발과 주상이 내린 대선사 교지(大禪師敎旨)를 두륜산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입적한 날에는 제사를 제자들이 주관케 하라.”

이러한 유의(遺意)가 있어 서산대사는 묘향산에서 열반하였으나, 대사의 3년 상을 마친 뒤 제자 영잠(靈岑)등이 유의를 받들어 의발을 짊어지고 두륜산으로 옮겨왔다.

 

그 후 대사가 입적하신지 28년 만인 1,631년(인조 9년.숭정4) 봄, 문인 소요 태능(太能. 1562-1649) 등이 조선 중기 4대문장가 이었던 신풍부원군 장유(張維.1587-1638)에게서 비문을 받아 대흥사 부도전에 청허당 보제선사 비를 세웠다.

“서산 청허선사가 별세한 후 28년 만에 법사(法嗣)인 해안(海眼) 등이 비를 묘향산과 금강산에 세우기 위하여 비명을 지을 때, 문도들이 의논하기를‘우리스님의 영골을 소장한 곳은 비록 여기라 할지라도 그가 출가하여 불법을 얻기는 사실상 남방으로 부터이니, 천관(天冠)의 여러 사찰과 두륜산 대둔사는 일찍이 주석(住錫)하신 곳 인 만큼 그에 대한 기록이 없지 못하리라.’ 하고 해안이 서장을 써서 내 집에 당도하여 비문을 청하였다.”

또한 ‘명산에 부도(浮屠)를 세우고 오래도록 유주(釉珠)를 간직하도다.’하였는데, 이는 대사의 부도를 이때 같이 세웠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문의 끝자락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헌대부(資憲大夫) 참찬삼관(參贊三館) 대제학(大提學)

신풍(新豊) 장유(張維) 찬(撰)

당악 후학(棠岳後學) 백련유인(白蓮幽人) 윤인미 서 (尹仁美 書)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삼무술(三戊戌) 구월(九月)

 

당악은 해남의 옛 이름이고, 백련은 연동마을의 옛 이름이다. 윤인미는 고산 윤선도의 장남인데, 님이 비문을 받아와 글 쓸 사람을 찾던 중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던 아홉 살의 인미가 썼다고 녹우당 책자에는 기록하고 있는데, 인미가 1,607년 생 임에 비추어 25세 때이다.

이 비문이 세워지고 1,655년에는 남은 유품을 모두다 대둔사로 가져왔고, 승도들이 영각을 지어 제향을 올리니 이후 서산문중(西山門中)의 본산(本山)으로 삼게 되었다. 이후 대둔사에서는 십삼(十三) 대종사(大宗師)와 대강사(大講師)가 배출되어 조선 후기 불교 부흥의 요람(搖籃)이 되었다.

 

그 후 나라에서는 임진왜란에 공이 큰 의승장(義僧將)들의 충의를 기리어 여러 곳에 사당을 세웠는데 서산대사가 입적한지 185년이 되던 해인 1,788년(정조12)에 대사의 7세 법손인 계홍(戒洪)과 천묵(天黙)이 상소를 올리니, 호부상서 서유린(徐有隣.1738-1802)에게 그 처리가 맡겨짐에 “선묘가 내리신 전교(傳敎)와 의발(衣鉢)이 호남 대둔사(大芚寺)에 간직되어 있으니, 영남의 예에 따라 사당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표충 이란 편액을 내리는 것이 조정에서 포장(褒獎)하는 뜻에 부합됩니다.”

이에 정조임금은 사당건립을 인가하고‘표충사(表忠祠)’라 사액(賜額)하니, 중앙에 휴정서산(休靜西山). 좌우에 유정사명(惟政.四溟)과 처영뇌묵(處英.雷黙)대사를 배향하였다.

 

이듬해인 1,789년 4월 예관을 보내어 향축을 올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한 1,791년에 홍문관 제학 서유린에게 간청하여‘표충 기적 비’의 명문을 지어 세웠다. 1,794년에는 정조임금이 직접 ‘서산대사 화상당명(西山大師畵像堂銘)’을 대둔사에 내려서 현재 박물관에 액자로 보존되고 있다.

 

이와 같이 대사는 평안도에 태어 나셔서 지리산에서 불도를 깨달으시고 천관산의 여러 사찰과 두륜산에서도 수행 하셨음을 말하여 주고 있는데, 조선의 북쪽 끝에서 열반하시면서도 잠시 스쳐 가셨던 3,000리 남쪽 끝 대둔사에 유독 의발을 보관토록 유언을 하시었으니, 그 인연은 무엇이었을까? 미혹한 백성들이기에 충이 흥기되기를 바라서 그 유품을 대둔사에 보관하도록 하라는 대사님의 대흥사에 대한 사랑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丁丑年 小雪節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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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선규 2009-12-28 오후 5:48:44 덧글삭제
    대흥사 신도로서 서산대사의 유지를 받들고 있는 대흥사가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 김업 2019-11-11 오후 1:59:43 덧글삭제
    저는 기독교이지만 우리고장에 대흥사가 있다는것은 참 자랑스럽고 서산대사께서 73세의 노장으로 전투에 참가 하신것이 대단 합니다 교과서에 실어서 후세에 귀감이 되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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