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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대사(下-2)

  • 임선규
  • 2009-09-20 오후 9:09:41
  • 12,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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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4년(선조 37년, 갑진년) 정월. 눈이 많이 내린 묘향산 원적암(圓寂庵)에서 서산대사는 제자들이 멘 가마를 타고 산내 암자와 법당을 두루 참배하고 둘러보았다. 영문을 모르는 제자들은 “날씨도 춥고 눈길도 위험한데 좀더 따뜻해지면 외출하시지요”라고 아뢰었다. 대사는 말했다. “오늘이 아니면 갈 수 없느니라.”


부처님께서 열반하시기 전 3달 전부터 열반을 준비하신 것처럼 서산대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죽음을 준비하였다. 깊은 산사에 대사의 죽음을 알리는 열반종(涅槃鐘)이 울렸다. 제자들을 위하여 평생 화두인 ‘마음’으로 마지막 설법을 하였다.


이어서 주장자를 곧게 세우고 ‘임종게(臨終偈)’를 읊었다.


천 생각 만 가지 헤아림이

붉을 화로에 한 점의 눈이로다.

진흙소가 물 위를 가나니

대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


千思萬思量(천사만사량) 紅爐一點雪(홍로일점설)

泥牛水上行(이우수상행) 大地虛空裂(대지허공열)
                                <청허당집 권1, 임종게>


대사는 자신의 영상(影像-초상화)를 가져오라 하여 그 뒷면에 단정하고도 힘있는 필법으로 영찬(影讚)을 썼다. 이 글씨가 <청허당집(묘향장판)>에 그의 영상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팔십 년 전에는 저것이 나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저것일세.


八十年前渠是我(팔십년전거시아) 

八十年後我是渠(팔십년후아시거)


그리고 임종 때 자리에 있지 않은 수제자 사명스님과 처영스님에게 각각 유언을 써놓고 나중에 전하라고 분부하였다. 이 두 스님은 마치 부처님의 수제자로서 전법에 열심하다가 임종을 지키지 못한 마하가섭처럼 승병을 이끄는 승병장이라서 나라의 부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문도(門徒)들에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거든 의발(衣鉢-스님의 옷과 밥그릇. 스승이 제자에게 심법(心法)을 전수할 때 흔히 증표로서 의발을 준다)을 반드시 전라도 해남에 두어라. 그곳은 두륜산이 있고 산 안에는 대둔사가 있어서 남쪽으로 원광산(遠廣山)을 바라보고, 북쪽으로 월출산(月出山)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천관산(天冠山)이 있고, 서쪽으로는 선은산(仙隱山)이 있으니 내가 옛날에 들려서 마음껏 즐기던 곳이다.


또한 해남은 국토의 끝으로 낙지(落地)요, 취약지구가 되어서 왕의 은혜와 교화가 미치지 못하여 백성들이 우매하다. 따라서 그들 중에서 나를 관람(觀覽)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들로 하여금 충성스런 마음을 일으키도록 할 것이다.”


유언을 마치고 대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채 좌탈입망(坐脫立亡)하였다.

 

대사의 세수(世壽-세상 나이) 85세요, 법랍(法臘-출가하여 도를 닦은 햇수) 65세였다.


서산대사가 돌아가시자 그 방안에는 21일동안 향기가 가득찼으며, 불교의 장례법에 따라 시신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한 뒤 사리(舍利) 3과를 얻었다.


제자 원준과 인영이 2과의 사리를 묘향산 안심사와 보현사에 부도탑을 세우고 안장하였고, 사리 1과는 제자 자휴가 금강산 유점사 북쪽에 부도탑을 조성하여 모셨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뒤 장유가 비문을 쓴 청허대사비가 대흥사에 세워진 후 묘향산에 있던 대사의 유품이 속속 대흥사로 옮겨져 왔다.


1655년에 제자 명조정대(明照頂戴)가 스승의 유언에 따라 옥발(玉鉢), 벽옥발(碧玉鉢) 3좌, 당혜(唐鞋) 2쌍,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백초장상(白綃長衫), 벽옥발우(碧玉鉢盂) 삼합(三合), 칠보염주 삼조(三組), 차거유리배 및 교지(敎旨)를 두륜산 대흥사로 옮겨서 보관하고, 이후 서산문중의 본산으로 삼았다.


대흥사에서는 서산대사의 유촉(遺囑)을 받아 대사의 의발과 선조가 내린 대선사교지(大禪師敎旨)를 묘향산에서 옮겨와 보관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사가 입적한 날에 제자들이 제사를 주관해 왔다. 그래서 대흥사에서도 서산대사의 사당을 건립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을 하게 된다.


정조는 대흥사 승려들이 올린 청원을 받아들여 전교(傳敎)와 함께 사액(祠額)을 내림에 따라 정조 12년(1788년) 사당인 표충사(表忠祠)가 세워져 서산대사, 사명대사, 처영대사 세 분의 영정을 모신 뒤, 매년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게 됐다.


그 청원서 내용 속에 사명당 유정이 지은 서산대사 행장이 들어 있다. 유정이 지은 ‘서산대사의 행장 <유정찬기행장(惟政撰其行狀)>’내용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유정이 행장(行狀)을 지으니, 선사께서 입적하던 날에 제자에게 유촉하기를 "내가 시적(示寂)한 뒤에 의발을 호남도 해남현 두륜산 대둔사(대흥사)로 옮겨 기일날 제사를 지내라. 두륜은 벽우(僻隅-후미진 곳)에 있어 명산은 아니나 귀중하게 여기는 삼절(三絶)이 있다.


첫째는 기화이초(奇花異草)와 편시광경(片時光景)과 포백숙율(布帛菽栗)이 변하지 않고 오래 가며 멸망하지 않는다. 내가 두륜산을 보건대 이곳은 긍장(亘長)의 구역이다. 북에는 하늘을 떠받치는 월출산이 있고, 남에는 서로 얽혀서 이루어진 땅꽂이가 괸 달마산이 있다. 또 바다와 산이 서로 호위하므로 동부(洞府)가 深邃(심수)하여 만세(萬世) 동안 헐어 깨뜨릴 수 없는 땅이다.


둘째는 천리나 떨어진 곳이라 임금의 덕화(德化)가 완급(緩急)을 가릴 것 없이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늘 아래 모든 곳이 왕토(王土)가 아닌 곳이 없다. 나라를 향한 충성을 일으키기 어려워서 큰 공적을 내세울만한 것은 없다. 성주(聖主)의 깊은 은혜를 관감(觀感)으로 빙거(憑據)한다면 후세에 어찌 표수풍성(表樹風聲)하여 우매한 풍속을 깨우칠 자가 없겠는가.


셋째는 처영(處英)과 모든 제자들이 모두 다 남쪽지방에 있다. 내가 처음 출가할 때 서로가 불법은 두류(頭流)에서 들었으니 이곳을 宗統으로 삼는 것이 도리어 귀중한 일이 아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유촉을 쫓아서 의발과 주상이 내린 대선사교지를 두륜산으로 옮겨서 보관하고 입적한 날에는 제사를 제자들이 주관케하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서산대사는 우리 민족사에 있어 위대한 호국 대성사요, 사상가요, 걸출한 시인이었다. 대사의 85년 삶은 반전(反轉)에 반전을 거듭하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극적이다.


오십이 가까운 노모는 꿈에 천하대장부를 얻을 것이라는 노파의 축하를 받고 서산대사를 낳는다. 시와 문장에 능한 천재 소년이 아홉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됐다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고 승과에 장원급제하여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서른 여섯에 최고의 자리인 선․교 양종판사가 된다.


칠십 고령에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겨울눈이 펄펄 내리는 묘향산에서 의금부로 압송되어 형틀에 묶여 혹독한 심문을 받다가 오히려 왕에게 인정받게 되고, 임진왜란을 맞아서는 몸소 백마 타고 의승군을 이끌어 국난을 극복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러나 은둔한다.


한편 서산대사의 종교적 신념과 사상은 ‘선․교일치(禪․敎一致)’이다. 서산대사의 선교관(禪敎觀)을 대표할 수 있는 말은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이다.


서산대사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려고 애쓴 이유는 조선의 숭유억불 상황에서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이 하나가 돼 힘을 합쳐도 시원치 않을 판에 서로 자기 종파가 부처님의 정법이라고 우기면서 싸우고 상대를 비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처님의 마음이나 부처님의 말씀이나 근원은 부처님 한 분이다. 부처님께서 진리를 깨달으시고 그 깨달으신 내용을 중생을 위해 언어 문자로 표현해 놓은 것이 대장경이다. 대장경, 즉 경전에 의지하여 불법을 수행하는 것이 교종이다. 반면에 선종은 언어 문자를 떠나서 언어화하기 이전의 마음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을 종지(宗旨)로 삼는데 모든 문자나 언어, 심지어는 부처님의 말씀인 경전(經典)까지 부정하고, 본래의 마음에 눈뜨기를 강조한다.


선종과 교종의 대립과 갈등은 중국에서는 물론이요, 통일 신라 말 선종이 최초로 전래된 당시부터 중앙 귀족을 옹호하는 교종과 지방 호족을 지지하는 선종으로 나뉘어 싸웠을 정도로 해묵은 것이며, 고려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려는 통일 불교 사상 또한 꾸준히 나타나면서 한국불교의 전통을 이루었다. 신라 원효대사의 화쟁(和諍) 사상 이후 고려 때 대각국가 의천은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보조국사 지눌은 선교일치 사상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이 실질적으로 해결되어 조계 단일종으로서의 실현을 본 것은 서산대사에 의해서였다.


대사는 선․교 양종판사를 겸하여 교단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는 8도 16종 도총섭으로서 역시 불교 교단의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대사는 지리산을 중심으로 절대적인 존경 속에서 교화를 편 스승인 부용대사의 심법을 이었고, 북쪽 묘향산에서 교화를 폈던 사숙인 경성당 일선대사의 신임과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남북에 걸쳐 전국적으로 불교 교파의 존경과 신임에 의해서 불교 교단의 통합이 가능했던 것이다.


대사는 대승 계율 정신으로 도탄에 빠진 중생과 국가를 구하기 위해 승병을 일으킨 호국 대성사이시자 종교적으로는 ‘선교일치’ 사상으로 교종을 선종에 포섭, 귀일케 하는 조선 불교의 통일 운동을 이뤄낸 한국불교의 중시조(中始祖)이시다.


그런 위대하신 분의 의발이 자랑스럽게 해남 대흥사에 전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서산대사, 최명익 지음, 자음과모음>, <서산대사, 김형중, 밀알>, <서산사상과 신자유주의, 신지견, 화은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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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낙곤 2017-09-22 오전 10:41:29 덧글삭제
    덕높은 큰스님의 종적을 조금이나마 알고 숭고한정신을 지금 이시대를살아가는 우리모두에게 지혜등불이 되어서 분명한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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